2026.04.17금

작성일: 2024-02-16 14:04 (수정일: 2024-02-16 15:06)
2023년 1월 17일 오후 3시, 굴포마을회관에서 굴포당제-고산 윤선도 선생 감사제 추진협의회가 열렸다. 각 마을 이장님들과 노인회장님, 그리고 전대에서 당제를 모셨던 어르신 몇 분, 굴포마을 어머니 몇 분이 참여하셨다.
이 날은 2월 5일 굴포당제 추진주체와 역할을 분담하고,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세우기로 했다.
그런데 회의 중간, 회의자료에 표기된 내용 때문에 마을 주민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회의자료에는 아랫당-할아버지당, 윗당-할머니당으로 표기되었고, 사회자였던 내가 당 위치를 주민들에게 물어보자, 주민들은 이구동성으로 “옛날부터 윗당이 할아버지당이었고, 아랫당이 할머니당이었다”, “뭘 모르는 사람들이 당을 바꿔서 말하지만, 우리는 어렸을 적부터 그렇게 알고 있고, 여태 바꿔 부른 적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비로소 나는 머릿속에 혼재되어 있던 ‘할아버지당’과 ‘할머니당’의 위치를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굴포당제 실무에 참여하면서 자료를 모아보니, 연구자들마다 당 위치를 달리 표기한 것을 보고 회의 때 마을주민들에게 확인을 해둬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굴포주민들은 정말 명확하게 굴포당 위치를 설명해 주었다. 누구도 당 위치를 거꾸로 말하지 않았다.
아래는 굴포신당유적비 표기와 굴포당제 관련 연구서들의 당 표기
∎‘굴포신당유적비’, 1986년 4월 17일, 백포 곽남배 주도 건립 : 윗당 할머니당, 아랫당 할아버지당 표기.
→...당시 굴포촌장을 비롯 의병들은 아랫당터에서 전사하여 할아버지당이라 하고, 촌장부인과 부녀자들은 웃당터에서 전사하여 할머니당이라고 불려오전 중.....
∎『진도군의 문화유적』 <굴포당제>, 목포대학교 박물관, 1987. 표기 혼용 표기
→ 내용 전반부에는 아랫당(할아버지당), 윗당(할머니당)으로 표기했으나, 후반부에는 반대로 서술하고 있다. 주민들의 구술시기를 보면 1986년 12월인데, 굴포신당 유적비와 당개축을 87년 4월 17일에 한 사실로 보면, 연구자가 신당유적비문을 바탕으로 주민들의 구술을 정리했을 개연성이 있다.
∎<작업방식의 변화를 통해 본 놀이 분화양상에 관한 연구>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굴포리의 사례, 구양희, 1990.
→‘초하룻날에 조상세배, 초이튿날에는 당하납씨(당할아버지-윗당), 당함씨(할머니-아랫당) 세배’라 표기. ‘마을의 거주형태는 예전의 상여집이 있던 생재고랑을 중심으로 웃말과 아랫말로 나뉜다. 웃말에는 주로 토박이들이 살고 있으며, 하납씨당(할아버지당), 식수 공급원과 빨랫터로 2개의 공동 우물이 있다’고 기술. 논문에서 실제 연구는 1988년~1989년까지 진행.
∎국립민속박물관 아카이브, 1993년 11월 30일 조사 자료.
→아랫당을 ‘굴포마을 할아버지당(윤선도공덕비)’으로 표기. 윗당을 사진과 함께 ‘굴포리 할머니당’으로 표기하고 있다. 사진 자료에 한정된 것으로 보면, 연구자가 ‘신당유적비문’ 또는 ‘진도군의 문화유적’ 내용을 참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도 굴포만 어로민속의 변화와 공동체문화> 허산, 2004.
→ 윗당을 당할아버지, 아랫당을 당할머니라 표기했다. 다만, ‘아래 당 윤선도 사당과 함께 윗당이 마을 뒷산에 위치했다 1990년 소실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디지털진도문화대전’, <굴포당>, 나경수 : 윗당 할아버지당, 아랫당 할머니당 표기
→ ‘제당은 할아버지당과 할머니당 두 곳이 있었는데, 현재 남아 있는 할아버지당은 굴포리 마을 위쪽에 있고, 지금은 사라진 할머니당은 마을 입구에 있었다.
할아버지당과 할머니당은 원래 모두 초가로 된 단칸집이었다. 한때 할아버지당은 태풍으로 인해 무너지기도 했는데 1986년에 두 당집 모두 개수되었다. 개수하면서 할아버지 당집 앞에는 조경을 위하여 인조목재로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의 두 장승을 세웠다. 굴포신당유적비를 통해서도 1986년 개수할 때 신당과 함께 장승을 세웠음을 알 수 있지만, 현재 장승은 없다.
현재 할아버지당은 대문채를 갖춘 단칸집이며, 대문채와 당집 모두 맞배기와지붕이다. 할머니당이 있던 곳에는 현재 정충사(精忠祠)라고 하는 배중손 사당이 세워져 있다. 사당 옆에는 ‘굴포신당유적비’를 세워 그곳이 당제를 모시던 할머니당이었던 곳임을 알려주고 있다.
현재는 마을 위쪽에 남은 할아버지당에서 정월 보름 당제를 지내고 있다. 부근에는 고산 윤선도가 이곳 굴포에 원뚝을 막아 개간지를 만들 때 심었다고 전하는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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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굴포마을 주민들은 할아버지 대부터 ‘윗당-할아버지당, 아랫당-할머니당’으로 인식하고 당제를 모셔왔으나, 어느 시기부터인가 연구자들의 기록물로 인해 당 위치가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굴포당제를 연구하면서 심층적인 인터뷰를 진행했던 것으로 보이는 연구자들의 논문에서는 그 위치가 바뀌지 않았다. 민속연구를 위해 굴포에 와서 ‘굴포신당유적비’ 비문에 나와 있는 내용을 참고했겠지만, 이들은 마을주민들의 구술을 더 중요하게 받아들여 ‘윗당-할아버지당’, ‘아랫당-할머니당’으로 기술했던 것이다.
그런데 2024년 2월 설 명절을 앞두고 진도문화원에서 ‘진도문화’를 발간하면서 ‘임회면 고굴포마을의 고산사 유감’(24p~36p)이라는 ‘논문’을 게재했다. 이 논문은 지난 2023년 10월 진도문화원에서 주최한 ‘진도역사문화강좌’에서 다뤘던 내용을 보완한 ‘학술논문’으로 알려져 있다.
이 발표자료에 대해, 이미 본인은 진도군청 홈피 자유게시판에 여러 차례 반박글을 올리고 논문 전문을 폐기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진도문화원은 전문 그대로 ‘진도문화’에 게재하고 전국에 있는 독자들, 도서관, 기관 등에 배포해 버렸다.
본인은 진도문화원장에게 2월 8일, ‘반론에 대한 아무런 검토 없이 허위 왜곡 주장으로 가득한 글을 그대로 진도문화에 수용하셨군요...(후략)’라는 문자를 보냈다. 그런데 최근 모 역사학자가 문자 내용을 전달받았다면서 ‘사과하지 않으면 고소하겠다’는 내용의 메일을 보내왔다.
자, 그렇다면, 모 역사학자의 ‘학술논문(?)’ 가운데, 단순한 주장을 넘어서는 의도적 ‘허위 왜곡 주장’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보겠다.
하나, 당 위치 허위와 왜곡 - 한 논문에서 무려 30여 차례 허위 기술
역사학자 모씨는 진도문화에 10페이지 분량의 학술논문을 기고하면서 30여 차례 ‘윗당=할머니당, 아랫당=할아버지당’으로 표현했다. 자신이 인용한 자료들 가운데는 분명 ‘윗당-할아버지당’, ‘아랫당-할머니당’으로 인식할 수 있는 내용이 있었을 것이다. 또한 본인이 진도군청 자유게시판에 반론 글을 올리면서 이 내용도 언급한 부분이다. 하지만 당초에 역사학자 모씨는 당 위치를 바로잡을 생각이 없었던 듯하다. 왜냐하면, 그가 자신의 글에서 주장의 빼대로 내세운 것이 ‘굴포신당유적비’였고, 그 비문에 당 위치가 거꾸로 표기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굴포신당유적비가 마치 검증받은 역사서인양 원전으로 내세우며, 굴포당을 왜곡하는 것도 모자라 엉뚱하게 윤선도 집안 공격에 혈안이 되기도 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가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는 증거로 내세운 사진 자료들에 원래는 없던 설명을 달아 마치 그 사진 저작권자들이 ‘윗당=할머니당’, ‘아랫당-할아버지당’으로 표기한 것처럼 속이고 있는 것이다. 더욱 이상한 것은 ‘굴포당제보존회’에서 배포한 보도자료 사진에까지 자신이 만들어낸 캡션을 달아놓은 것이다. 의도하지 않았다면 이처럼 반복적으로 30여 차례나 당 위치를 바꿔서 표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굴포 주민들 누구도 당 위치를 평생 동안 바꿔서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역사학자와 <진도문화> 때문에 본인은 최근에도 굴포마을에 들러 94세 노인에게 당 위치를 다시 물어봐야 했다. 그 할아버지는 자기 할아버지 때부터도 윗당이 할아버지당이었다고 말씀하셨다. 당연한 사실인데도 자기검열을 또 하게 된 것이다.
둘, 고산 윤공선도 사적비 건립 왜곡
모 역사학자는 자신의 학술논문(?)에서 굴포주민들의 자발적 행동에 대해 근거 없는 왜곡을 일삼고 있다. <진도문화> 29p를 보면,
‘그러나 해남윤씨 종친회는 그에 강하게 반발하고 4개 마을(굴포, 남선, 백동, 신동) 청년 대표들과 함께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라는 데에 뜻을 같이하고 자금을 모아서 1991년 4월 6일에 주민 이름으로 ‘할아버지당’과 ‘굴포신당유적비’ 사이에 ‘고산윤공선도선생사적비’를 세웠다’라고 주장했다.
1991년 4월 6일에 세워진 ‘고산윤공선도선생사적비’에 얽힌 이야기는 이 비 건립을 주도한 남선리 주민 강진간씨의 구술에 자세하게 소개돼 있다. 80년대 말경, 강진간씨를 비롯한 인근 마을이장들이 진도군수에게 윤선도사적비 건립을 건의하자,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들은 “굴포신당유적비는 무슨 근거로 허락도 받지 않고 세웠소?”하고 따져묻자, 군수는 윤선도와 굴포 간척지에 대한 근거를 찾아오라 했다고 한다. 그들은 고민 끝에 해남으로 건너가 해남윤씨종친회 관계자를 만났다. “예전 할아버지 대에서부터 진도에 와서 제를 모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기록이라도 찾아주시오.”하니, 종친회에서 “지금 찾으려면 시간이 걸리니 돌아가서 기다리시오.”해서 빈손으로 진도로 돌아왔다. 2년 정도 지난 뒤, 해남윤씨종친회에서 연락이 왔다. “우리 집안에서 진도 굴포에 오고간 일기가 있으니 가져가시오.” 이렇게 일기 두 장을 복사해 진도군청에 제출한 뒤 4개마을에서 성금을 걷어 윤선도선생사적비를 세웠다고 한다. 사적비 제막식 때 해남윤씨종친회에서 찾아와 일부 찬조금을 보탰다고 한다. 강진간씨 등 네 마을 주민들은 2년 동안 얼마나 복창이 터졌겠는가!
이 비를 세울 시기에 진도에는 ‘해남윤씨종친회’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해남윤씨 진도종친회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1998~99년 무렵이었다.
1999년 배중손 사당이 건립되고 당제를 모시게 되었다. 백포 곽남배 선생은 이장을 비롯한 주민들에게 당굿을 쳐달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마을주민들이 사당으로 들어와 당굿을 치려하자, 배씨문중에서 시끄럽다면서 당굿을 중단시켰다. 배씨문중에서 당제를 지내는데 왜 주민들이 방해를 하느냐는 것이었다. 정충사에서 쫓겨난 주민들은 진도군청으로 가서 항의시위를 하고 돌아와 장구와 고깔 등 굿물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해남윤씨종친회가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바로 이 때부터였다고 한다. 주민들이 ‘굴포신당유적비’에 적힌 삼별초와 배중손 관련 기술이 근거가 없고, 만들어낸 것이니 바로 잡고 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윤씨 문중에서 주민들을 대리해서 법적 대응을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 결과로 법원에서 조정된 내용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역사학자 모씨는 자신의 ‘학술논문’에서 ‘고산 윤공선도 사적비 건립’을 마치 해남윤씨종친회가 주도한 것처럼 표현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네 개 마을 대표자들이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주도한 행동이었다. 그들은 ‘당제’를 모시는 입장에서 양심을 속이는 일을 반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당제를 모시는 어르신들이 당의 영험함을 진실로 믿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백포 곽남배 선생이 굴포당을 소재로 삼별초 항몽사라는 역사적 사실을 덧씌워 굴포마을에 문화재라는 업적을 만들어내고자 노력했다고 한다면, 굴포 주민들과 인근 마을 주민들은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자기고백’을 하면서 ‘윤선도사적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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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 역사학자 모씨는 <진도문화>에 기고한 자신의 ‘학술논문’에서 확증편향오류를 기반으로 굴포당의 역사를 왜곡하고, 굴포당제를 모시는 주민들을 악의적으로 폄하 내지는 몰상식화하고 있다.
<진도문화p30>
'(1)굴포신당(할아버지당)은 복원되고 존속되어야 한다. 지금으로부터 750여 년 전에 배중손 장군 휘하 삼별초군과 굴포 촌장을 비롯한 굴포 지역민들은 굴포마을과 진도 그리고 오랑국을 지키기 위해 ‘할머니당’ 터에서 여몽연합군과 온종일 육박전을 치르다가 최후를 마쳤었다. 이후 320여 년이 지난 1596년에 굴포 지역민들은 그들의 희생정신과 영혼을 기리고 위로하기 위해서 ‘굴포당’(할아버지당, 할머니당)을 지었다. 그리고 이후에 매년 정월 15일에는 ‘할아버지당’에는 ‘당할아버지(굴포 촌장과 의병들)의 위패를, ’할머니당‘에는 ’당할머니‘(촌장 부인과 부녀자들)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냈었다.
당할아버지, 당할머니는 마침내 굴포마을의 수호신이 되었던 것이고, 이 수호신에 동제(제사와 당굿)를 지냄으로써 풍작・풍어가 보장되고, 전쟁과 역병으로부터 마을과 주민들의 안녕이 지켜지기 바랐었다. 이러한 굴포 특유의 동제는 어떤 공권력이나 제3자에 의해서도 훼손되거나 단절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후략)’
‘(2)정충사는 2021년 2월에 용장성으로 이전하기 이전의 자리에 복원되고 손속되어야 한다. ... (중략) 그런데 2021년 11월에 정충사는 고산윤선도선생 굴포 사적비・시비 건립추진위원에 의해서 고산사로 바뀌어버린 이래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즉 국가의 문화재와 서적으로 진즉 지정되었어야 했던 정충사가 일개 사문중의 사당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지금이라도 진도군과 전라남도, 그리고 문화재청은 정충사를 복원하고 존속시킴으로써 배중손의 자주적인 국가관과 반중화주의적인 역사의식을 선양해야 할 것이다’
위 기술처럼, 역사학자 모씨는 백포 곽남배 선생이 만든 굴포신당유적비문을 원전 삼아서 굴포가 배중손 장군의 전적지인 것처럼 규정하고, 굴포에서 수백 년 동안 배중손 당제를 모셔온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정작 굴포당제를 모시는 주민들은 백포 선생이 굴포신당유적비를 세우고 ‘배중손’을 내세웠을 때 “당을 팔아먹었다”고 비난했고, 지금도 “배중손은 굴포당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고, 백포가 지어낸 이야기”라고 말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역사학자 모씨는 굴포당제에 관한 마을주민들의 구술, 선행 향토사학자들의 연구를 자신의 ‘학술논문(?)’에서 인용하면서도 결국은 모두 배척하고, 오로지 굴포신당유적비 내용만을 사실로 간주하면서 굴포에 배중손 사당을 복원하라는 괴이한 주장을 하고 있다.
‘몽니’와 같은 억지주장을 학자적 양심으로 받아들여야 하겠는가? 이미 배씨종친회도 배중손 사당의 용장성 부지 이전에 대해 동의했고, 새로 지어진 정충사는 대궐 못지 않다고 한다. 항몽사를 기리는 일은 이제 전적지로 실증되고 복원된 그곳에서 해야 맞지 않겠는가!
어찌 보면, 배중손 장군에 대한 미화 사업 대해서 객관적으로 역사적 평가를 해야 하는 게 역사학자 본연의 일이기도 할 것이다. ‘삼별초 자주항몽사’는 반도사관과 군사독재시대의 무신정권 미화사업이라는 시각도 존재함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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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진도문화원이 발간한 ‘진도문화’에 실린 모 역사학자(?)의 학술논문에서 보이는 ‘의도적 오류’에 대한 소개를 끝내도록 한다. 그 외 오류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시간이 허락할 때 추가로 올리도록 하겠다.
나는 굴포당제보존회로부터 당제를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은 자격으로 이러한 글을 쓴다. 당제를 전승할 젊은이들이 없는 시골마을들, 오죽했으면, 나 같은 사람한테까지 도와달라 했겠는가.
그런데 진도문화원은 지역의 향토문화를 지키며 전승해야 할 기관이면서도 철저하게 굴포당제를 왜곡하는 글을 ‘학술논문’이라는 이유로 기관지에 게재하고 전국에 배포해 버렸다. 거기다 역사강좌까지 열어서 군민들을 가르치려 한다.
진도문화원에서는 ‘진도문화’에 역사학자 모씨의 글에 대해 반론을 기고하면 얼마든지 실어줄 수 있다고 한다. 이미 굴포당제를 난도질해놓고서 ‘반론’을 실어줄 수 있다? 참 기가 막히는 이야기다.
진도문화원은 지금이라도 굴포당제를 왜곡하는 사업을 중단하고, 향토민속문화를 전승하는 단체로서 굴포당제의 주체로서 나서야 한다. 진도에 얼마 남지 않은 고유의 문화다. 진도문화원이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면, 진도문화원이 살아남아 있어야 할 이유도 없다.
※ 2월 14일 오전 10시, 굴포마을회관에서 굴포당제추진위원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 진도문화원에서 원장님을 비롯 세 분이 참관했고, 굴포당제 왜곡 관련 해서 굴포당제보존회와 진도문화원이 의견을 나눴다. 진도문화원장은 ‘왜곡’을 끝내 인정하지 않는 대신, 반론 기회를 마련해 줄 테니 학술 발표에 참여할 것을 요청했고, 굴포당제 문화재 추진에 적극 찬성하고 협력하겠다고 밝혔다.
군사정권시절 새마을운동으로 마을마다 있던 당이 폐지되었지만, 덕병이나 굴포는 주민들 스스로 당을 지켜냈다. 당이라는 것은 당집이 아니다. 흙이고 물이고 나무고 돌이기도 하며, 하늘이고 바다이며 조상이기도 하면서 보이지 않지만 우리네 심장과 머릿속에 있는 기운이며 믿음이다. 당이 있는 곳에 당집을 짓는 것은 정성으로 모시기 위해서이기도 하겠지만, 후대에게 “여기에 당이 있었음”을 물려주기 위함이기도 하다. 마을마다 교회라는 이름으로 당집을 짓고 있는 지금, 정말 고유한 우리 당에서 당제를 모시고자 한다. 임회 굴포 함씨당은 누구나 와서 모시는 사람들의 당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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