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16-01-21 09:08

제목 겨울 쌍계사에서
작성자
박종호
조회
2752

겨울 산사에서

해를 넘기고 어디서 동백꽃이 필 무렵
진도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는 절
대웅전 보수에 들어섰다는 소문을 딛고
모처럼 내린 눈길을 따라 찾아갔다
눈이 맑은 주지는 보이지 않고
가로세로 십자가를 엮은 철근에 갇혀
볼상스럽게 대웅전이 갈비뼈를 드러내고
겨울 고행 동안거에 들어가 있었다
동지죽을 허겁지겁 들다 흘린 흔적들
문설주마다 식은 색깔이 닥지닥지 붙고
우량아 출신이 분명한 삼존불은
비만치료를 위해 복장을 다 비운 채
마당 앞 우화루에서 병후 조리로
가늘게 눈을 내리고 상념에 빠졌다
이 모든 사단은 등허리가 너무 휘어져
나라의 뛰어난 정형외과 의사들이
큰 맘 먹고 집도에 나서면서 부터다
얼룩 문신들을 하나씩 지우다가 보니
더 젊은 시절의 취향이 다른 문양
낮선 서양기법이 선연하여 깜짝 놀라
집도를 당장 멈추고 고뇌에 빠졌다
첨찰산 천연기념물 백칠호 푸른 치마
주름 속마다 붉은 동백꽃 트고 있는
두 골짜기 세례수 흘려보내는 쌍계사
나도 이 겨울 속에 탁한 가슴 찢고
염화시중 동박새 깃들게 하고 싶다.


*진도 의신면 사천리 첨찰산 자락에 자리한 쌍계사(주지 법오)는 해남 두륜산 대흥사 말사이다. 최근 법당 수리를 하면서 내부 벽의 덧칠 물감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서쪽과 북쪽 벽에서 놀라운 탱화가 발견되었다. 즉시 공사가 중단되었다.
절 관계자에 따르면 서양화 기법의 그림이란다. 시대는 그리 오래지 않다고 한다. 맨 위쪽 그림은 실경산수보다 유홍준식의 표현을 빌린다면 70년대 이발소그림의 전형이 깃든 유화물감 풍경화다. 직접 첨찰산 주변을 그린 듯하다.
일각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 알려진 춘곡 고희동의 작품일 가능성이 있다고 조심스런 견해를 내보이고 있다. 춘곡은 진도출신 화가 의재 허백련과 다섯 살 차이(연상)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왔다. 춘곡은 유화 자화상을 남기기도 했지만 다시 젊은 시절에 동양화로 돌아섰다.
1940년대 서울신문의 주관으로 조선 10대 화가 전시회에 의재와 함께 출품 전시를 한 적이 있었다. 벽화조성 시기는 그 이전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 춘곡선생은 의재 선생과 함께 진도를 찾은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모두도 추측에 불과하다.
단지 나도 내 가슴에 언젠가, 그 젊은 한 시절에 흔들리지 않는 초심 눈빛으로 어떤 그림들을 은밀히 새겨놓은 적이 있었는지 잠시 생각해 본다. 오히려 불안하다. 옷과 시간의 떼를 벗겨내면 더 추악한 욕망의 문양이 아무런 풍화도 없이 남아 있지나 않을는지 말이다.
더 어린 시절로 돌아가면 혹여 모르겠다. 초등학교 시절 십리 산길에서 진달래를 따먹고 동백꽃을 꼭지 뒤에서 쪽쪽 빨아먹던 시절. 책보를 매고 노루가 뛰는 모습과 꿩새끼들이 풀 속으로 숨어들던 그 봄 봄. 산 너머 마을을 상상하거나 먼 바다 위에 떠오른 손가락섬 발가락섬들을 보며 나는 무슨 꿈을 키웠을까. 그냥 산꽃 무더기 아래 머리를 눕히고 구름이 흐르는 하늘만 보았을까. 이 또한 부질없는 상념으로 지나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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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